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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광저우-류저우를 가다

[2023.12.5 광동뉴스]


중국 화남지역에는 과거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과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한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를 잡았던 광저우와 류저우를 중심으로 한 중국 화남지역의 독립운동사는 우리에게 소중한 기업임은 물론, 한중간 우정의 상징이기도 하다.


중국 근대 시기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이어진 손문의 광저우 봉기, 1917년 쑨원이 광저우에서 수립한 호법정부, 1927년 중국 공산당이 광저우에서 일으킨 광저우 코뮌 등...... 당시 피끓는 조선의 애국 청년들도 혁명의 열기를 좆아 광저우에 속속 모여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부터 광저우와 인연이 깊다. 1919년 9월 심산 김창숙이 광저우를 방문해 한국 독립후원회를 조직하고, 각계 인사들과 관계를 맺은 것이 시초였다. 1921년에는 국무총리 대리였던 신규식이 전권대사로 광저우에 파견되어 호법정부의 대총통인 손문 孫文을 면담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한국독립 운동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1938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찌는 더위 속에 광저우로 이동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나 각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항저우, 전장, 창사 등지로 차례로 옮겨갔는데, 중일 전쟁이 본격화되던 1938년의 6월에 이르자 후난성 창사에도 일제의 폭격이 심해졌다. 더 이상 창사에 머무르는 것이 어려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또다시 피난길에 올라야했다. 1938년 7월 19일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 100여 명은 당시 후난성 정부의 장즈중 주석의 도움을 받아 빌린 기차 한 칸을 타고 창사를 출발하여 나흘 만인 7월 22일 광저우에 도착했다.


광저우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조직도 정돈하지 못하고 재정적 여유도 없었으나 힘닿는 대로 활동을 적극 전개했다. 임시정부는 광저우에서 국경일 경축행사도 개최하고, 한국인의 항일 의지를 보여준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사진 전시회'를 열기도 했으며, 임시정부 선전부장 조소앙은 광저우시 단체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 혁명 운동의 상황'을 주제로 강연도 했다.


임시정부의 광저우 체류는 백범일지에도 그 기록이 있으며, 각종 사료를 토대로 주광저우총영사관이 광저우시 문화국 등 한중 유관기관과 협조해 소실된 줄 알았던 광저우 임정 청사 건물(동산백원) 소재지를 2016년에 최초로 발견, 확인하였다. 오랜 기억을 간직한 채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광저우 임정 청사는 어려운 시기에 한중 양국이 협력했던 우정의 역사를 상징하는 사적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다시 보따리를 싸 포산으로

임시정부가 광저우 동산백원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광저우에도 일제의 공습이 심해졌다. 임시정부는 두달이 채 못 되어 또다시 보따리를 싸야 했다. 김구는 충칭으로 먼저 떠나고, 다른 임시정부 사람들은 대부분 1938년 9월 초 포산에서 생활한 지 한 달 가량 지났을 때,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진공해 왔다. 이에 임시정부 일행도 포산을 떠나 광시좡족자치구 류저우를 향해 다시 이동하였다.

류저우에서 임시정부의 저력을 보여주다

1938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행 100여 명은 초라한 피난민 행색으로 광시좡족자치구 류저우에 도착했다. 임시정부국무위원 10-20여 명은 류저우 국민당 제7군장 랴오레이 장군이 제공한 '랴오레이 공관'에 입주하여 업무를 보았고, 임정 요인 일부는 당시 고급 호텔인 낙군사에 입주해 업무를 시작했다.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송병조, 지청천 등이 류저우로 왔다.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들이 류저우에 집결한 것이다.


류저우로 이동한 임시정부는 1938년 4월까지 약 5달간 이곳에서 머무르면서 항일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임시정부는 후에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 광복군으로 발전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를 류저우에서 조직해 중국인들과의 항일 투쟁을 모색했다.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는 1938년 2월 결성되어 임시정부가 류저우를 떠난 1939년 4월까지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현지 언론에 이들의 활동 기사가 20여 차례나 보도 되었으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성을 드높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1938년 11월 조선의용대로 우한에서 광시좡족자치구의 구이린으로 이동해 1942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임시정부, 다시 류저우에서 충칭으로

1939년에 접어들자 일본군은 광시좡족자치구와 하이난 등지를 공격해 왔다. 류저우도 상황이 위태로워졌다. 이에 임시정부 일행은 류저우를 떠나 충칭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의 동지들이 떠난다"는 소식이 퍼지자, 류저우 주민들도 매우 안타까워했다. 1939년 4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 일행은 구국 단체의 동지들, 같이 살던 이웃들과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고 충칭으로 향했다. 중간에 치장에 얼마간 머물다가 1940년 9월 충칭으로 이동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약 5년 동안 광복군을 창설하는 등 활발한 독립 운동을 펼쳤다.


푸젠성에서의 한인 무정부주의자들의 항일 운동

한편, 푸젠성에서는 특이하게도 아나키즘 계열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1920년대 후반부터 활발한 항일 투쟁일 벌였다.


아나키즘 anarchism은 지배자 혹은 권력의 부재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나르코스 anarchos에서 유래했다. 아나키즘, 즉 무정부주의는 국가뿐 아니라 자본주의, 공산주의, 종교 등 모든 영역의 '지배'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의지의 연합에 의해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고도의 인본주의적 이론이다.


아나키스트들은 항일 독립운동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펼친 것으로 알려진다. 푸젠성에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일제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민족적, 현실적 과제 해결을 우선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푸젠성을 무대로 한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민족주의, 공산주의와 함께, 무정부주의라는 민족독립운동의 뚜렸한 한 갈래를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푸젠성에서도 활동했던 우근 友槿 류자명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푸젠성 취안저우 설봉사에 묻힌 의열단 부단장 김상윤

푸젠성 취안저우에 위치한 설봉사에는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의열단 부단장 김상윤의 묘비가 있다. 1926년 의열단이 해체 위기에 봉착하자 김상윤은 의열단의 자금조달을 위해 샤먼에서 동분서주하던 중, 병을 얻어 샤먼 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설봉사에서 요양하다가 1927년 10월 31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글쓴이 김지혜)


참고자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중국 광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고증 조사보고서

강정애, 2019, "중국 화남지역의 한국 독립운동사", 주광저우총영사관

한시준, 2019, "임시의정원 100년 기념 특별기획, 임시의정원 사람들"



출처: 광동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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